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메유리 학도대 (문단 편집) == 설명 ==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을 목전에 둔 [[1945년]] 3월 23일 양 학교의 15~19세 여학생 222명(여자부 150명, 제1고등여학교 50명 가량)과 인솔교사 18명 총합 240명이 학도대로서 오키나와 [[슈리]] 주변의 하에바루 [[일본 육군]] 병원에서 [[간호]]요원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육군은 "1주일만 복무하면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고, 간호복무이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징집했지만 실제로는 90여 일 동안 고통을 당했고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오키나와 사범학교 남자부 학생 360명은 '철혈근황대'를 조직했는데 남자부 부장인 '나카무라' 부장은 이미 일본으로 [[빤쓰런]]했다. 여자부 부장 겸 현립 제1고등여학교 교장인 '니시오카 가즈요시'는 군 사령관의 말동무를 해야 한다며 군사령부 참모진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노다 교장이 남자부와 여자부를 모두 이끌어야만 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노다 교장이 철혈근황대를 따라 이동하면서 여학생과 인솔교사들만 남게 되었다. 당시 징집된 여학생들 중에서 50명은 졸업반이었고 차출된 후 6일째인 3월 29일 하에바루 육군 병원에서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여학생 중에서 10여 명은 [[오키나와]] 주둔 [[일본 육군]] 제32군 사령부 소속 [[장교]]들을 위한 전속 [[타자기|타이피스트]] 및 [[군무원|군속]], 심지어 [[일본군 위안부]]로 차출되었다.[* 남자들만 있으면 적적하다고 '필사병'이라는 이름으로 여학생을 각종 부서에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였으먀 고급 장교들은 신변을 돌봐줘야 한다며 여성을 한 명씩 두었는데 없는 장교가 드믈물정도였다.] 그나마 이들은 5월 말 32군 사령부가 키얀반도로 철수하기 직전에 사령부 동굴에서 동원해제되어 귀가하였다. 하에바루는 오키나와 전체를 관장할 목적의 대형 병원이었으나 전투가 시작되자 여러 방공호 속에 나뉘어 틀어박혔으며 며칠에 한번 순회진료 하는 군의무관의 유일한 치료는 붕대 갈기와 [[사지절단]]뿐이었다. 이런 방공호도 미어터져 기껏 일선에서 환자를 데려와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 분통을 터트리면서 환자만 병원 입구에 놔 두고 가는 일이 보통이었다. 병원에서 예과 3학년과 본과 1학년생들은 군간호사[* 민간 병원과 가정에서 자격증이 있는 자들을 동원하였다.]들을 도와 간호 업무를 하였고 그 이하로는 방공호 파기나 시체 처리 등을 하였다. 병원 운영에 꼭 필요한 위생병들을 돌격대로 구성해 돌격시키는 미친 행위가 이어지면서 그들이 해야 하는 업무까지 여학생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방공호를 나가 이동해야 하는 식사 수령, 물 긷기도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실제로 이 과정에서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일본군]] 총사령부가 있었던 슈리가 함락되면서 5월 26일 오키나와 남쪽 마카베촌으로 이동하였다. 물론 환자들은 데려갈 수 없어 '승홍정'이라는 이름의 염화제2수은 독약을 약이라며 나눠주었다.[* 모든 물자가 부족했지만 어떻게 된 게 자살용 수류탄과 독극물 주사만은 넉넉하여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지급되었다. 방공호에서 어린 아이가 울면서 소리를 내면 병사들의 지시로 어머니도 울면서 아이게게 독극물을 주사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여학생들도 자살용 수류탄을 지참하고 있었다.][[https://m.blog.naver.com/ddangmaster/221686417137|#]] [[https://youtu.be/9JqFuRVUWI4|#]] 걸을 수 있는 경상자들은 이미 전선으로 내몰렸기 때문에 부축받고서야 겨우 걷는 어정쩡한 환자들만 병원을 따라 이동하였는데 중도에 쓰러지면 독극물이 주사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마카베까지 갔지만 환자들을 수용할 대피호가 없어 육군 병원을 해산하고 환자들에겐 원대 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본부 방공호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병원장 사토 대좌마저 전사하였다.[* [[일본 해군]]이 후퇴를 거부하고 방공호에서 전멸한 후 육군이 섬의 남쪽의 방공호를 중심으로 흩어져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여학생들은 본부, 제1외과, 제2외과, 제3외과 방공호 등 4곳으로 나뉘어 수용되었다. 6월 18일 군부는 방공호에 갇혀 있던 히메유리 학도대에게도 돌연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여학생들은 [[몸뻬]] 종군복을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다함께 교가를 불렀다. 병사들은 물론 주민들마저 이들을 걱정하면서 '''제발 포로만은 되지 말라'''고 거듭 애원하였다. 해산명령은 사실상 총탄이 빗발치는 전방에 학생들을 버린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으며 히메유리 학도대는 약 1주일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사격이나 [[폭격]]이나 자살 종용 등으로 인해 사망했다. '''전체 사망자의 80%가 이 1주일 동안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제3외과가 숨어 있던 이하라 동굴 방공호가 화공(일명 너구리 몰이)를 당하자 탈출하지 못하고 6월 19일 아침에 여학생 32명, 군간호사 17명 등 거의 대부분이 사망하였다. 학도대를 기리기 위한 히메유리탑이 바로 이 방공호 앞에 세워졌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한편 제2외과 방공호는 6월 18일 너구리 몰이를 당했지만 일부는 살아서 빠져나왔고 제1외과는 6월 19일 오전 3시 해산한 후 방공호에서 나와 흩어졌다. 이렇게 해서 제3외과는 거의 전멸했고 제1외과, 제2외과 그리고 본부 소속이었던 여학생 100여명이 기얀 해안 인근을 헤매다가 자결하거나 길가에서 쓰러져 죽어갔다. 6월 21일 오후 2시에는 제1고등여학교 다이라 마쓰시로 교사와 그가 인솔했던 학생 10명이 '''공식적으로''' 집단 자결을 명받아 기얀 해안에서 자결하였다. 미군에 수용된 후에도 이전에 입었던 부상이 악화되거나 쇼크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6월 23일에는 우지시마 미쓰루 사령관과 조 이사무 참모장이 자결하여 사실상 전투가 끝났다.[* 이들과 함께 있었던 여자부 부장 니시오카는 자결하는 대신 여학생들 앞에 나타나 일장 연설 후 개별 행동하자며 도망쳤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8월 22일까지 방공호에 숨어 있던 세 여학생[* 제1외과 여학생들로 다 죽어서 비어 있던 제3외과 방공호에 숨어 들었다. 여기엔 종군 간호사와 위생병들도 약간 있었다.]들이 일본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항복하였다. 최종적으로 교사와 학생 240명 중 136명이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